딴짓하는 공무원들
행정은 맡은 일을 절차대로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돌아간다. 그런데 시키지 않은 일을 벌여 공공의 가능성을 넓히는 사람들이 있다.

시키지 않은 일을 벌여, 공공의 가능성을 넓히는 사람들
행정은 돌아갑니다. 공무원이 맡은 업무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처리하면 조직은 큰 문제 없이 유지됩니다. 보고서를 만들고, 민원을 처리하고, 공문을 보내는 일만으로도 하루는 충분히 바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장에서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기존 업무를 안정적으로 끝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선택은 자연스럽고, 때로는 가장 책임 있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변화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이 과정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 수 없을까?”, “이 자료를 국민이 직접 활용하게 하면 어떨까?” 같은 질문입니다. 공식 과제로 내려온 일도 아니고, 별도의 예산이 붙은 일도 아닙니다. 다만 현장에서 반복되는 불편을 그냥 넘기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도구를 만들고 데이터를 정리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딴짓’은 바로 그런 시도입니다.
작은 딴짓은 의외로 오래 남습니다. 개인이 만든 결과물이 공개되면 다른 공무원의 업무 도구가 되고, 연구자와 개발자의 출발점이 됩니다. 찾기 어려웠던 행정 정보는 검색 가능한 데이터로 바뀌고, 복잡한 제도는 이해하기 쉬운 지식이 됩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호기심이었지만, 나중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공 자산이 됩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두 사람은 그 과정을 실제로 보여줍니다.
1. 서호성 사무관 — 읽을 수 없던 정부 관보를 AI가 읽을 수 있게
관보는 중요하지만, 쓰기 어렵습니다. 정부 인사, 법령, 고시, 공고 등 핵심 행정 정보가 담겨 있지만 기존 문서 형식은 검색과 분석에 불편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필요한 내용을 찾으려면 사람이 문서를 하나씩 열어 확인해야 했고, 여러 시기의 내용을 비교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행정안전부 서호성 사무관은 이 문제를 데이터의 형태에서 풀었습니다. 6년치 정부 관보 약 13만 건을 인공지능이 읽을 수 있는 구조로 변환해 ’AI 리더블 관보’로 공개했습니다.
작업 방식도 실무적이었습니다. 오픈클로를 활용해 전체 변환 작업을 4일 만에 마쳤습니다. 이제 관보는 사람이 필요한 문서를 찾아 읽는 자료를 넘어, AI가 검색하고 비교하며 패턴을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가 됐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부처의 인사 흐름을 시기별로 살펴보거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고시 내용을 묶어 보는 작업이 훨씬 쉬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손이 많이 가던 업무를 줄였다는 점입니다.
AI 리더블 관보: https://hosungseo.github.io/ai-readable-gazette-kr
제도 설명도 한 장이면 달라집니다. 서호성 사무관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대한민국 대표제도 TOP 100’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도 100개를 한 장짜리 업무구조도로 정리한 작업입니다. 실무에서는 제도의 목적과 담당 기관, 처리 절차가 여러 문서에 흩어져 있어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긴 설명문 대신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처음 업무를 맡은 담당자나 제도를 빠르게 이해해야 하는 협업자에게 특히 유용한 형태입니다.
대한민국 대표제도 TOP 100: https://hosungseo.github.io/korea100
2. 류승인 주무관 — 공공문서와 법률 정보를 AI의 언어로
공공문서는 AI에게 까다롭습니다. 서울 광진구청 류승인 주무관은 공공기관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서와 법률 정보를 AI가 실제로 다룰 수 있게 만드는 오픈소스 도구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대표 프로젝트인 Kordoc은 HWP, HWPX, PDF 문서를 AI가 분석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문서 속 문단과 표를 추출하고, 여러 문서를 비교하거나 내용을 정리하는 작업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추출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서를 만드는 흐름까지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한글 문서입니다. 공공행정 현장에서는 여전히 HWP와 HWPX 형식이 널리 쓰이지만, 일반적인 AI 도구가 이 파일을 바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담당자가 내용을 복사해 옮기거나, 형식을 변환한 뒤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Kordoc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반복 작업을 줄이려는 도구입니다. 기술 자체보다 실제 업무 흐름에서 막히는 부분을 먼저 본 프로젝트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Kordoc: https://github.com/chrisryugj/kordoc
법령도 연결이 필요합니다. 류승인 주무관이 개발한 한국법령 MCP는 법률, 판례, 행정규칙 등의 정보를 AI가 활용할 수 있도록 MCP 형태로 제공합니다. AI가 학습 과정에서 기억한 정보만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법률 데이터에 접근해 필요한 내용을 검색하고 확인하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규정 검토, 관련 법령 찾기, 행정 업무 질의처럼 정확한 근거가 필요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법률 검색과 공공업무 지원 서비스의 기반 도구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국법령 MCP: https://github.com/chrisryugj/korean-law-mcp
공무원의 딴짓이 공공의 자산이 될 때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의 프로젝트 모두 거대한 예산이나 공식적인 혁신 사업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반복해서 마주친 불편을 실무자가 직접 문제로 정의했고, 필요한 도구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결과물을 개인 업무에만 사용하지 않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한 점도 같습니다. 그리고 AI를 보여주기 위한 데모가 아니라 관보, 한글 문서, 법령처럼 매일 다루는 업무에 적용했습니다.
공개된 딴짓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서비스의 기반이 되고, 연구자와 개발자에게는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가 됩니다. 공무원에게는 반복 업무를 줄이는 도구가 되고, 시민에게는 공공정보에 접근하는 더 쉬운 통로가 됩니다. 조직의 공식 경계를 조금 넘은 시도가 조직 밖에서 더 큰 가치를 만드는 셈입니다. 작은 프로젝트라도 공개되고 연결되면 공공의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공공혁신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 방식이어야 하지?“라는 질문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직접 한번 만들어 보자”는 실행이 다음 단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딴짓이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장의 불편을 정확히 짚고 결과를 공유하는 시도는 분명히 남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계속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키지 않은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들여 만든 결과를 다시 모두의 자산으로 돌려놓습니다. 그 작업은 화려한 혁신 구호보다 조용하지만, 실제 업무를 조금씩 바꿉니다. 복잡한 행정을 더 쉽게 이해하고 활용하게 만드는 힘도 여기서 나옵니다. 대한민국 행정을 앞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딴짓하는 공무원들입니다.